정부 상대 재심 청구 제주4·3생존수형인 18인 중 양근방씨

▲ 20일 제주시 애월읍의 자택에서 제주4·3생존수형인 양근방 어르신이 당시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문정임 기자

 

 

 

 

 

 

 

 

 

 

 

 

 

 

 

“정식재판까지 70년, 지난 세월 억울하지만 이제라도 기뻐”

이유도 모르고 끌려간 낯선 도시의 형무소 마당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민간인이었지만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비극이 시작된 건 1948년. 열여섯이던 그의 집에 토벌대가 들이닥쳤고, 뼈도 덜 여문 형제들의 몸 위로 빨간 피가 솟구쳤다.

지난해 4월 정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한 제주4·3생존수형인 18명이 지난 3일 제주지방법원으로부터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았다. 지난 6일 제주지방검찰청이 즉시항고를 포기하면서 생존 수형인들은 70년 만에 정식 재판을 받게 됐다. 오는 10월 29일이 첫 기일. 70년, 한 사람의 일생과 맞먹는 시간이 걸렸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의 자택에서 청구인 중 한 분인 양근방(86) 어르신을 만났다. 그는 “오늘도 법원에 광주에서 징역 살았던 흔적을 확인하러 다녀왔다”며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참 좋다. 그 날 이후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1948년, 제주 섬에 불어 닥친 검붉은 바람은 조천읍 와산리에 살고 있던 한 소년의 집에도 들이닥쳤다. 밥상에 둘러 앉아 숟가락을 막 잡으려 할 때,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소년은 감자공장 창고에 갇혔다가 인천 형무소로 옮겨졌다. 재판이라는 말은 듣지도 못 했는데 7년을 선고 받았다. 얼마 뒤 6.25전쟁이 터졌다. 인천으로 내려온 북한군이 문을 열어주어 석방됐지만 고향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한국군에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다. “제주에서 온 이들은 다 빨갱이다.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밤 산으로 끌려갔다. 총알은 아랫배를 관통해 엉덩이를 뚫고 나갔는데, 다행히 장이 터지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이후 다시 붙잡힌 그는 광주와 목포형무소에서 징역을 더 살다 6년 여 만에 사면됐다.

그런데 모진 삶이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리던 고향에서는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다시 육지로 갔다. 다시 제주로 돌아온 것은 1990년 즈음. 그의 나이 60이었다. 어렵게 낳은 6남매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 해 바른 일자리를 얻지 못 했다. “아들 둘이 장가를 못 갔어. 내 삶이 온전치 않았으니 아이들도 공부를 많이 못 했어. 너무 미안해 걔들한테.”

사실 4·3도민연대가 손을 내밀기 전부터 재심 청구 소송을 준비했었다. “몇 명이 모여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증명이 어려워 힘들거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었어,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잘 이어진 거야.”

양 할아버지는 “어릴 적 고향에 살 때 밥 먹으려던 가족을 총으로 쏜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다. “죄 없는 내가 총을 세 번이나 맞았던 것, 감옥에 가서 6년을 살았던 것까지 내 한을 다 말할 수 없다”고 되뇌였다.

하지만 이번 재심 개시 결정을 받으며 그는 4·3이후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지만 징역이다 도망이다 생의 절반을 육지에서 살았거든. 농장 일 하면서. 힘든 날, 억울한 날 말도 못 하지만, 나라가 이렇게 우리 뜻 받아들여주니 마음이 좀 풀리는 것도 같아. 내가 소송 청구한 18명 중에 나이가 많은 편이거든. 근데 내가 제일 건강해. 동생들한테 그랬어. 이 죄 벗기 전에는 절대 죽지 말라고, 이 죄 벗기 전에는 절대 아프지도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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