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대상포진 ‘아픔’의 시간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
100세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시력 등 몸의 ‘이상신호’ 나이 자각
‘포기’ 안다면 여유로운 시간들
격정의 시간 지나는 것의 안도감

최근 뜻밖의 질병과 싸우느라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상포진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바이러스가 신경세포를 타고 번지는 특징 때문에 그 통증이 대단했습니다. 아무튼 그 덕에 오랜만에 푹 쉬면서 빠르게 변하는 우리 사회 풍조와 현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상상만 하던 ‘100세 시대’가 현실로 다가온 지금, 평소처럼 무탈하게 정상적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일지 셈해보니 생각보다 한참 많은 몇 십 년이더군요. 생후 95번째 해를 지나시는데도 여전히 몸도 정신도 팔팔하여 독립적인 삶을 즐기시는 어머님을 보며 제 인생 남은 시간에 대한 책임감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습니다.

수명 연장이라는 최근의 현상이 제 개인에게 행복일지 불행일지를 좌우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생각됐습니다. 청년·장년·중년·노년이라 시기를 구분 짓는 개념조차 점점 모호해지는 요새는 ‘환갑’의 위상도 확 바꿔놓았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꽤나 중요한 모멘텀이었던 시절 치르던 성대한 잔치는 사라지고 그저 61번째 맞는 생일로 지나가고 있더군요. 심지어 환갑인데도 아직 학업이나 결혼을 못한 자녀를 둔 경우도 있어, 덕택인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여전히 젊은 척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지금도 이러할진대 요즘처럼 만혼시대, 결혼 기피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청장년들이 환갑을 맞이할 즈음, 어쩌면 성인기에 채 이르지도 못한 청소년 자녀를 양육해야 할 책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좀 더 일찍 태어나 좋은 시절을 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안도하는 한편 그들이 측은하게 생각되기도 하네요.

다른 건 몰라도 지칠 줄 모르는 체력, 튼튼한 신체를 믿고 있었는데 하나 둘씩 이상 신호가 오게 되니 ‘나이듦’을 실감합니다. 동안(童顔) 열풍이 아니더라도 영양가 높은 음식, 좋은 화장품, 멋진 의복 등으로 어찌어찌 관리하면 외양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듯 하지만 순발력·민첩함 이런 능력들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음을 압니다.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인지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의욕도 줄어 은근 의기소침해지기도 합니다.

‘나이듦’이 이렇듯 아쉬운 점, 좋지 않은 일만 늘어나는 거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어디 그렇기만 할까요? 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들이 줄어드니 책임이나 부담은 줄고, 포기할 줄만 안다면 더없이 여유로운 시간과 경험으로 쌓인 지혜와 요령으로 인해 산다는 게 한결 수월해지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되어 좋은 건 어떤가요? 예전엔 예상이나 계획과 다르게 돌아가는 현실 때문에 조바심으로 동동거리며 노심초사하고 끈질기게 들이대던 일도 이제는 좀 더 느긋하게 받아들일 줄 알고, 빠르게 정리하는 결단의 지혜가 늘고, 참고 견뎌내는 힘도 생겨 기다리고 돌아가는 길을 찾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책장이 꽂혀있던 류시화 시인이 엮은 잠언시집을 꺼내 다시 읽다 보니 예전과는 다른 공감으로 가슴이 찡해옵니다. 지금 감동을 주는 시들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나 ‘내가 늙었을 때…’와 같은 것입니다. 한참을 달리던 나이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의 돌’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런 시들이 가슴 속 깊이 들어와 위로가 됐었는데 말이지요.

어린 시절, 젊음이 자랑이었던 시절, 과연 제게도 찾아올 것인지 상상조차 안 되었던 시간이 어느새 다가왔습니다. 두렵고 싫을 것만 같았던 예상과는 다르게 다가온 ‘나이든 이 시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도리어 치열하게 겪어내야 할 격정의 시간이 거의 지나가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는 진정한 나 자신을 즐길 준비를 시작할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새로운 희망이 생겨 새삼 ‘나이듦’에 대한 감사가 밀려옵니다. 또다시 다가올 아름다운 시절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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